꽃과 Nice-Photo

[스크랩] 내 눈의 들보

이혁주기자 2007. 5. 29. 12:04
 


 

        나는 오랫동안
        시력 2.0의 슈퍼 파워 여인이었다.

        나와 함께 고속도로를 달리면,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있는 도로표지판을
        제일 먼저 읽고 안내를 해주기 때문에
        동승한 사람들이 감탄을 하곤 했다.

        그러던 내 눈에도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눈이 찌르듯 아프고 잘 안보이고,
        두통도 생기고......
        햇빛이 너무 센 호주에서 살았던 탓일까?
        혹시?

        안과에 가보니,
        시력이 좋던 사람은 노안도 빨리 온단다.
        결국 호주의 날씨 탓이 아니라,
        많아지는 내 나이 탓이었다.

        "이번에 사온 노트북이 너무 컴팩트형이라
        글이 작게 보이잖아?"

        정말 사기 싫었던 돋보기라는 생경한 물체를,
        일단 사두긴 하지만,
        뭐 쓸 일이야 설마 많겠어?
        이렇게 미워하며 모셔두었던 돋보기를,
        공부하던 아이들도 잠이 들고
        뉴스에 매달리던 남편도 코고는
        어스름한 새벽녘
        컴퓨터 앞에 마주앉아,
        아무도 안 듣는 투정을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은근슬쩍 끼어보니,

        '왜 이리 작던 글씨가 크고 시원하게 잘 보이냐?'

        허, 참...
        뺐다 끼었다를 반복하며 감복을 하고 있다가,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갔다.

        어머나 세상에나......

        어제도 청소기를 돌리고
        깨끗이 치웠다고 자부하던 부엌 바닥에
        웬 머리카락들이 텍사스 사막에
        마른 덤불 굴러가듯 굴러다니고,
        그러고 보니, 밥 할 때 마다
        행주로 닦았던 밥통 위에
        묻은 고춧가루 하나며, 잔 먼지며,
        싱크대 주변의 깔끔하지 않은 물때들이며......

        가슴이 쿵 내려앉아,
        물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다시 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아이들에게 철저히 제 주변을 치우라고
        잔소리 하던 엄마,
        아이들은 이 엄마가 관리하는
        집안의 청결 상태가 이리도 엉망인걸 알면서도
        한 마디 항거도 없이 엄마의 잔소리를
        묵묵히 감내하고 있었단 말인가?

        남편도 이렇게 지저분한 여자와
        여태껏 아무 불평 한 마디 없이
        살아오고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당신 머리카락 좀 흘리지 마.
        변기 좀 깨끗이 써......
        그런 구박을 다 한 귀로 흘리며
        말로만 깔끔을 떠는
        여자를 참아 오고 있었나?

        가만히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매니큐어에
        잔 마디 몇 개 더 있어 보이는,
        내 손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여자의 손이 무릎 위에 얹혀있다.

        안방으로 들어가 잠자고 있는
        남편 얼굴을 가만 들여다본다.
        평소에 몰랐던 점이 왜 이리 많으며
        대낮에도 안보이던 흰머리는
        언제 이렇게 늘었어?

        그래서 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
        배우자 얼굴의 주름 보지 말라고
        눈도 어두워지는 것인가?

        참 고마운 조물주의 섭리다!

        딸아이의 침대 머리맡에 조용히 걸터앉아
        비단처럼 곱고 빤빤한 줄만 알았던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이제 시작하려는지,
        머리카락 덮인 이마 사이로
        삐죽이 고개 내민 자잘한 여드름들.
        돋보기가 아니었으면 하나 밖에 없는
        딸애의 여드름도 못 보고
        인생을 지나칠 뻔 하였다.

        이불을 다 걷어 차 낸
        아들 얼굴을 들여다본다.
        얘는 한참 전에 없어진 줄 알았던 솜털이
        아직도 얼굴에 보송보송하다.

        오동통한 두 뺨에 눈물 젖은 입맞춤을 해 본다.

        언젠가,
        눈이 어두워진 어머니가 싸 주신,
        머리카락 든 도시락을 그리워하던
        어떤 효자의 글을 읽으며 흘렸던,

        똑 같은 눈물이 아들의 두 뺨에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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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당사랑[당신사랑]
    글쓴이 : VJ 이대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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